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족 공국 (문단 편집) === [[작센]] 공국 === 부족 공국으로서 작센 공국은 현재 독일의 [[작센]] 주와는 다른 지역이었으며, 현재 독일의 [[니더작센]] 주와 [[슐레스비히-홀슈타인|홀슈타인]], 그리고 [[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]]의 북부에 해당했다. '''즉 1180년 이전의 작센은 독일 왕국에서 가장 북쪽에 있던 지역이었다.''' 독일의 5대 부족 중 유일하게 바다와 접하고 있었고, 때문에 [[발트해]]나 [[북해]]로의 진출과 무역이 활발했다. 5세기경 작센족(색슨족)이 브리타니아[* 이 무렵에는 [[잉글랜드 왕국]]은 물론 앵글로색슨 7왕국도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.]를 침공한 것도 바로 북해 연안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. [[서로마 제국]] 멸망 이후 작센족은 작센 왕국을 세웠고, 다른 게르만족과 마찬가지로 [[아리우스파]]를 받아들였다. 서쪽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[[메로베우스 왕조]]의 [[프랑크 왕국]]과는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. 그러다가 772년 [[카롤루스 왕조]] [[프랑크 왕국]]의 [[카롤루스 대제]]가 이단을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작센 왕국을 침공하여 근 40년간 지속된 작센과 프랑크의 처절하고 잔혹했던 전쟁이 시작되었다. 카롤루스는 이단을 처단한다면서 점령한 작센 지역에서 학살을 일삼았고, 작센인들은 카롤루스의 군대에 격렬하게 저항했다. 이 전쟁으로 작센의 인구가 크게 감소할 정도였는데, 결국 810년 마지막 항쟁이 실패하면서 작센은 프랑크 왕국에 완전히 병합되고 말았다. 프랑크 왕국에 합병된 후, [[슬라브족]]과 [[노르드#s-2|노르드족]]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작센 백작 리우돌프가 850년 작센 공작이 되어 리우돌핑거 가문[* 훗날 [[오토 왕조]](작센 왕조)]의 시조가 되었다. 900년 동프랑크 왕국이 사실상 5개의 부족 공국들의 연합 왕국 체제로 전환되었을 때 작센 공국의 류돌핑거 가문이 가장 강성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. 911년 [[루트비히 4세|루트비히 4세 유아왕]]이 사망하여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자 5대 부족 대표들이 모여 차기 왕을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는데, 류돌핑거 가문의 작센 공작 [[하인리히 1세]]가 가장 강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다. 그러나 하인리히 1세는 연장자인 프랑켄 공작 [[콘라트 1세]]에게 왕위를 양보했다. 이후 [[하인리히 1세]]는 아들이 없는 [[콘라트 1세]]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고, 919년에 독일 국왕이 되었다. 하인리히 1세의 아들 [[오토 대제]]는 962년 [[신성 로마 제국]]의 초대 황제가 되었고, 이때 작센 공위를 빌룽 가문에 하사했다. 그러나 [[오토 왕조]]는 여전히 작센 공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. 이후 작센 공위는 주플린부르크 가문, [[벨프 가문]], 아스카니아 가문[* [[안할트]]의 통치 가문으로 [[호엔촐레른 가문]] 이전 [[브란덴부르크]]를 통치하기도 했다. [[러시아 제국]]의 여제 [[예카테리나 2세]]가 이 가문 출신.] 등을 거치게 된다. 작센 공국의 전성기는 12세기 [[벨프 가문]]의 [[하인리히 사자공]](Heinrich der Löwe) 시절이었다. 하인리히 사자공은 [[엘베 강]] 동쪽으로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여 동방의 슬라브 영토로 진출, [[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|메클렌부르크]]과 [[포메른]] 공국을 정벌하고, 속국화시켜 그곳에 도시를 건설했으며 [[동방식민운동|독일 식민 정책]]을 추진했다. 사자공 하인리히가 1154년 남부의 [[바이에른]] 공국까지 지배하게 되면서 [[벨프 가문]]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. 사자공의 [[벨프 가문]]은 황제 [[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]]보다 훨씬 넓은 영지를 보유하게 되었고, 황제와 사자공은 거의 일평생에 걸친 권력 싸움을 이어갔다. 바르바로사 황제는 사자공의 반대 세력을 결집한 후 1180년 사자공에게 제국 추방령을 내리며 그의 영지를 모두 몰수하여 자신의 측근들에게 재분배하였다. 이로써 부족 공국으로서의 작센 공국은 해체되었다(1180년). 이후 [[작센]]이라는 명칭이 워낙 유서 깊은 이름인지라 한때 작센 공국을 지배했던 [[안할트]]의 아스카니아 가문이 13세기에 [[작센]]이라는 타이틀을 줏어다가 사용하게 되었지만, 당시 아스카니아 가문은 구(舊) 작센 공국(~1180년)과는 관련이 없는 [[비텐베르크]] 일대를 다스리고 있었다. 아스카니아 가문에 의해 시작된 신(新) 작센은 이후 [[베틴 가문]]을 거쳐 오늘날 독일의 [[작센]]주로 이어지게 된다. 그러나 현재의 작센주는 1180년 이전의 구 작센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, 현재 작센주 홈페이지도 비텐베르크 시절을 작센주 '''1,000년''' 역사의 시작으로 표기하고 있다. 한편 구 작센의 영토는 1180년 사자공의 추방과 함께 여러 제후들에게 분할되었고, [[벨프 가문]]은 대부분의 영지를 빼앗긴 채 [[브라운슈바이크]] 일대의 사유지만을 아무런 작위도 없이 소유하게 되었다. 그러다가 1235년 제국회의에서 바르바로사 황제의 가혹한 조치를 다소 완화하여 일부 영지를 환수해주었고, 벨프 가문의 사유지와 합쳐서 [[하노버 왕국|브라운슈바이크-뤼네부르크 공국]]이 세워졌다. 벨프 가문의 브라운슈바이크-뤼베부르크 공국은 이후 하노버 공국, 하노버 선제후국을 거쳐 [[하노버 왕국]]으로 승격되었고, 오늘날의 [[니더작센]] 주로 이어지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